오늘의 말씀과 묵상

Title오늘의 말씀과 묵상. 연중 제6주일(02/13/2022)2022-02-12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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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과 묵상. 연중 제6주일(02/13/2022)

 

<1독서> 예레미야 17, 5-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2독서>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 12.16-20

 

형제 여러분,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루카 복음 6, 17.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와 17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모든 삶에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삶이 늘 기쁜 것만도 아니요 늘 슬픈 것만도 아닙니다.

늘 괴롭고도 힘겨운 불행한 삶도 어쩔 수 없이 있겠지만 또한 즐거움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 신앙인의 삶에도 이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이러한 감정을 넘어 믿음으로 삶을 해석해나가는 사람입니다.

 

저도 인생의 여정에서, 신앙의 여정에서 참 많은 이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에서 기쁨을 지닌 이들도 만났고 슬픔에 잠겨 있는 이들도 만났습니다.

기쁨을 지닌 이들과는 기쁨을 나누고 슬픔에 잠겨 있는 이들과는 슬픔을 나눕니다.

그러나 자주 당혹한 느낌을 받곤 할 때가 있었는데 특히 기쁨의 때에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이는 드물고 슬픔과 노여움의 때에 하느님을 비난하거나 책임을 지우는 이들을 만날 때가 그러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우리가 불행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우리의 건강이 나빠지고 우리가 하는 일이 잘 되지 않아 실패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하느님이 바라시겠습니까?

하느님과 불행, 혹은 저주라는 말이 어울리기나 하겠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이의 불행을 바라지 않는다면 과연 하느님이 그러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느님께 자주 책임을 묻곤 합니다.

그럴 때 언제가의 강론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느님을 위한 변명이라도 여러분께 드리고 싶습니다.

할 수 있다면 하느님의 가슴이라도 열어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유를 찾기 힘든 어려움을 겪을 때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그 간절한 마음이 그리 하느님께 탓하는 모양이 된 것을 왜 제가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것도 슬픔의 표현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께서 우리가 잘 되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라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의 삶에 얼마나 개입하고 싶으시겠습니까?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해서는 안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얼마나 큰 어려움인지 우리 모두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나친 개입도 지나친 방관도 모두 올바른 삶의 방식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하실 만큼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할 만큼 합시다.

불행을 만드는 이가 아니라 복을 짓는 이로 살아갑시다.

저주를 만드는 이가 아니라 행복을 만드는 이로 살아갑시다.

그것이 우리에게 바라는 오직 한 가지 주님의 뜻입니다.

 

복을 짓는 사람들,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이번 한 주간도 주님의 평안이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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