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과 묵상. 사순 제5주간 금요일(4/3/2020)
제1독서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0,10-13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찬미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모두 평안하시죠?
제가 사무실 옆 회의실에 그동안 여러분이 주셨던 반찬그릇 중 일부를 두었습니다.
그릇이 무려 수십 여개에 이릅니다. 가만히 여러분의 사랑과 관심과 격려를 봅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한 분 한 분 되돌려 드리며 인사도 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신다면 성당에 오셔서 가져가주시면 안될까요? 댁에서 나와 성당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 기도도 드리고 그러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내 그릇이 없는데” 하시는 분은 아직도 제게 있으니 차후에라도 그렇게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감사의 기도와 인사를 드립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위해 하였던 그 염려와 걱정보다 더 큰 은총으로 주님께로부터 힘 입으시길 기도드립니다.
미국 넷플릭스사에서 제작, 배급하는 “메시아”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영어식 발음으로 하자면 “메사이아”가 되겠지요. 아무튼 “주님의 말씀”이 세상에 오시어 일어나는 각자, 혹은 국가적 대처가 이야기의 주 흐름입니다.
오늘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겪어야만 했던 혼란과 각자의 이야기들, 그리고 만약 언제나 묻게 되는 질문이지만, 나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하는 생각의 끝에 이릅니다.
만약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은 과연 하느님 그대로 자유로우실까?
내가 믿고 싶고 우리가 원하며 교회가 바라는 하느님 상을 만들어놓고 우리도 그렇게 지내는 것은 아닐까?
과연 하느님 만큼 오랫동안 오해된 이가 있을까?
얼마만큼의 오해를 걷어내어야만 하느님 본래의 모습을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때로는 하느님께서도 당신 자신의 모습과 우리가 만들어낸 하느님 상에서 혼란스러워 하시지는 않을까 그런 저런 생각의 끝에 이릅니다.
여러분은 아니 우리는 하느님이든 그 누구든 당신이 만들어 놓은 그 모습 속에서 그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만들어놓은 그 허상들을 걷어내는 것이 두려워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 자신이 그 허상들의 한 복판에 우리 자신도 그렇게 서 있는 것은 아닐까요?
드라마가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Who are you?”
아마도 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질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이든 자신이든 그 누구든 소위 우리가 “안다”라고 할 때 생기는 부작용이 훨씬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를 볼 때, 우리의 판단과 생각과 관념 속에 두지 말고 그냥 단순히 마음으로부터 물어보는 자세가 필요하지는 않을까요?
“Who are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