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미예수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미사 묵상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25일 밤 성탄 대축일 밤미사 강론을 실어드립니다.
내용이 길기 때문에 독서와 복음 말씀은 생략합니다.
말씀 안에서 깊이 하느님 사랑에 다가가는 은총의 오늘이 되시기를 기도드리며,
모든 분들께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건강하게 이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시고 내년의 성탄 미사는 모든 이들이 기쁨으로 함께 주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럼 교황님의 강론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시겠어요?
2020년 12월 25일 성탄 미사 강론(교황 프란치스코) 오늘 밤 이사야의 위대한 예언이 실현됩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삶의 가장 큰 기쁨이 자녀의 탄생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자녀의 탄생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아주 큰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기운이 솟게 하고 피곤함이나 불편함,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도 거뜬히 이겨내게 합니다. 더 이상 어떤 것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성탄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가 해마다 내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그분 안에서 모든 시련에 맞설 힘을 찾게 하는 새로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를, 저를, 여러분을,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하여”라는 이 거룩한 밤에 여러 번 들려옵니다. 이사야는 예언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화답송에서 우리는 되풀이합니다. “오늘 우리를 위하여 구원자께서 태어나셨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다”라고 말하고 복음에서 천사는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고 선포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그런데 우리를 “위하여”라는 이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본성상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께서 은총을 통해 우리를 복된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려고 아들로 세상에 오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선물입니까?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놀라게 하시고 우리 각자에게 ‘너는 놀라움이다’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사랑하는 형제님,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대 자체가 실수였다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까?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다. 너는 내 자녀이다.” 실패와 부족함을 느끼고 시련의 어두운 터널에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할 두려움을 느낍니까?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만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대와 함께, 그대를 위해 몸소 아기가 되심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모든 새로움의 출발점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는 데 있음을 일깨워주십니다. 이것이 우리 희망의 무너지지 않는 중심이며 우리 삶을 지탱하는 핵심입니다. 우리 모든 강점과 약함 그 아래에는 우리의 지난 상처와 실패들 또는 미래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과 걱정들보다 더 강력한 이 위대한 진리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모두 사랑받는 아들, 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거저 베푸시는 사랑, 순절한 은총입니다. 오늘 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거저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성부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물건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기쁨인 외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배은망덕과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들을 향한 우리의 불의를 바라보면 의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많이 주신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가? 주님께서 아직도 우리를 믿어주시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분께서 우리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과대평가하십니다.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시기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그분의 방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그분의 비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내면을 치유하시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임을 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지칠 줄 모르는 사랑, 우리를 변화시키는 변함없는 그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서만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예수님의 사랑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가장 깊은 상처를 치유하며 실망과 분노와 끊임없는 불평이라는 악순환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어두운 마굿간, 누추한 구유에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참으로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물음이 생깁니다. 왜 그분께서는 밤에 마땅한 숙소도 없이 가난과 거부 속에서 태어나셨을까요? 가장 웅장한 왕궁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태어나셔야 마땅하신 분께서 말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당신의 구체적인 사랑으로 우리의 끔찍한 비참을 어루만지시기까지 우리 인간 조건을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버림받은 이로 태어나셨습니다. 버림받은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분께서는 여느 아이가 세상에 오듯이 약하고 여린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온유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베들레헴에서 하셨듯이 우리에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난함을 통해 놀라운 일들을 하시기를 좋아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마굿간 구유에 놓아두셨고 우리의 가난함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자비가 우리의 비참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게 해드립시다. 한 아들이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는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하여”라는 말을 다른 데서도 듣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이 표징,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는 우리를 위한 표징, 삶에서 우리를 인도할 표징입니다. 빵의 집이라는 뜻의 베들레헴에 하느님께서 구유에 누워계십니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분이 필요하다고, 우리가 먹는 빵처럼 그분이 필요하다고 알려주시듯 말입니다. 우리는 거저 얻어지는 지치지 않는 구체적인 그분의 사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우리는 오락과 성공, 세속적 쾌락에 대한 갈망으로 결코 우리를 채우지 못하고 그저 공허하게만 만들 뿐인 그런 음식으로 우리 삶을 채웁니까?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한탄하십니다. 소도 나귀도 주인이 놓아준 구유를 알건만 그분 백성인 우리는 우리 생명의 원천인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채워지지 않는 소유욕 때문에 우리는 베들레헴의 구유는 잊은 채 우리 자신을 수많은 덧없는 구유들 속에 내던집니다. 그 구유는 모든 점에서 비천하지만 사랑으로는 더 없이 부유하기에 삶의 진정한 자양분은 하느님께 사랑받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보기를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아기가 되십니다. 그분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지만 생명을 주십니다. 반면에 우리는 말은 많이 하지만 종종 선함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는 아이에게 얼마나 큰 사랑과 인내가 요구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아이를 먹이고 돌보고 씻기고 종종 이해하기도 어려운 아이의 요구와 약함을 보살펴주어야 합니다. 자녀는 우리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지만 또한 사랑받는 법을 가르쳐 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돌보도록 재촉하시기 위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의 연약한 울음은 우리의 온갖 변덕이 아무 쓸모없는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무장해제시키시고 무장해제된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지닌 시간을 우리 자신을 위해 슬퍼하는데 보낼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의 눈물을 위로하는데 써야한다고 일깨웁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궁핍한 분으로 우리 곁에 머무십니다. 이는 가난한 이들을 섬김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한 시인이 말했듯이 오늘 밤부터 하느님의 집은 내 집 옆에 있고 그 집의 가훈은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 아드님이신 당신께서 저를 아버지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당신은 제가 꿈꾸는 제 모습이 아니라 제 있는 모습 그대로 저를 사랑하십니다. 구유에 아기이신 당신을 품에 안으며 저는 다시 한번 제 삶을 품습니다. 생명의 빵이신 당신을 맞아들이며 저도 제 생명을 내어놓고자 합니다. 당신은 제 구원자이시니 제가 섬길 수 있도록 가르쳐주소서. 당신은 저를 홀로 두지 않으시니 제가 당신 형제자매들을 위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오늘 밤부터 모두가 제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