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과 묵상

Title오늘의 말씀과 묵상. 사순 제2주간 금요일(03/05/2021)2021-03-05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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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과 묵상. 사순 제2주간 금요일(03/05/2021)

 

<1독서>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7,3-4.12-13.17-28

 

3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4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12 그의 형들이 아버지의 양 떼에게 풀을 뜯기러 스켐 근처로 갔을 때,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네 형들이 스켐 근처에서 양 떼에게 풀을 뜯기고 있지 않느냐? , 내가 너를 형들에게 보내야겠다.”

17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뒤따라가 도탄에서 그들을 찾아냈다.

18 그런데 그의 형들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그가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19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20 ,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21 그러나 르우벤은 이 말을 듣고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낼 속셈으로,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다시 말하였다.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 르우벤은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내어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낼 생각이었다.

23 이윽고 요셉이 형들에게 다다르자, 그들은 그의 저고리, 곧 그가 입고 있던 긴 저고리를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졌다. 그것은 물이 없는 빈 구덩이였다.

25 그들이 앉아 빵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보니, 길앗에서 오는 이스마엘인들의 대상이 보였다. 그들은 여러 낙타에 향고무와 유향과 반일향을 싣고,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26 그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27 , 그 아이를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자. 그래도 그 아이는 우리 아우고 우리 살붙이가 아니냐?” 그러자 형제들은 그의 말을 듣기로 하였다.

28 그때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었다. 그들은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겼다. 이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3-43.45-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어제 늦게 비가 내리더니 오늘 아침은 참 화창하게 개였습니다.

우리 마음의 어둠도 이렇게 걷히고 새 날이 밝아오길 기도드립니다.

오늘은 금요일이지만 저녁에 미사를 드리고 이어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공동으로 바칩니다.

한국에서는 누구나 사순절이면 특별히 십자가의 길 기도를 자주 바치는데 이곳 미국에서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으니 할 수 있으면 더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아침 7시에 성모님의 덕행을 기리며 미사가 봉헌됩니다.

오시기 어려우신 분은 마음으로라도 함께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참 위험한 감정 중 하나가 질투입니다.

질투는 때때로 어떤 일의 발전적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질투로 인해 빚는 비극이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넓습니다.

짐짓 그렇지 않은 체 하지만 질투가 불화의 원인이고 그 감정을 잘 소화하지 못하면 평소에 생각지도 못한 자신 안의 악한 면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일찍이 칠죄종 중의 하나로 질투를 일컫기도 하였습니다.

 

질투는 마치 본능처럼 우리 안에 언제나 있습니다.

질투심이 커지면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생겨납니다.

나를 질투의 끝에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생겨나는 질투심을 어찌할 수 없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성 바실리오는 그의 수도규칙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녹이 쇠를 좀먹듯이, 질투는 그것에 사로잡힌 영혼을 병들게 한다.”

탈무드에도 질투는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도 올바로 보지 못한다.”라고 전해집니다.

 

보통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질투라는 감정에 더 자주 휘말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당신의 목숨값으로 되산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우주보다 더 고귀한 가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질투라는 감정을 자신의 발전적 계기로 삼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의 자존감은(자존심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한없이 고양되어야 합니다.

 

시편에 이르기를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시편 8,5)” 라고 고백합니다.

이토록 큰 사랑을 마음에 헤아린다면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아 주시는지 잘 알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은총을 언제나 기억합시다.

하느님의 돌보심과 하느님의 섭리하심을 기억합시다.

 

꼭 질투를 느끼고 싶다면,

그렇다면 저는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에 질투를 느껴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만 닮고 싶습니다.

 

평화가 함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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