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과 묵상. 연중 제6주간 금요일(02/17/2023)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1,1-9 1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서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5 그러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을 보시고 6 말씀하셨다.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8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34-9.1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내 안에 세운 바벨탑 영어권에 살아가는 우리는 영어에 압박이나 스트레스를 받곤 합니다. 저는 물론 더욱 심한 편인데요. 우리가 힘들어도 한인 성당에 나오게 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도 언어문제일 것입니다. 언어가 다르며 생겨나는 다양한 문화적 차이가 그 이유이기도 하지요. 그러면 모두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 안 될까? 하는 질문은 그래서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유효하게 적용됩니다. 옛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나 봅니다. 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이렇게 서로 다른 말과 문화가 존재할까? 바벨은 성경의 의미로 말하면 “혼돈, 혼란”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의 독서 말씀을 보면, 하느님이 당신에게 이르지 못하도록 혼란을 만든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결과로서 그렇게 우리에게 전해진 것일 테고 성경의 의미로 보자면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좌절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요즘의 바벨탑은 인간 유전자 조작 연구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치유의 목적으로, 온전한 삶으로의 목적으로 유전자 연구 운동이 활발하겠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택적 유전자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이 점점 커진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하느님을 넘어서 하느님이 필요 없는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 과연 그럴 때 인간은 행복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과학이 더 크게 성장할 때 인류 미래는 행복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따라옵니다. 선택의 기준이 인간에게 있을 때, 그리고 실질적으로 모든 선택에서 모든 이의 의사가 존중되지 않을 때 생겨나는 그 혼란은 오히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에 비하면 훨씬 더 크지는 않을까요? 그렇다고 하여 현대의 과학이나 의학기술을 배척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 기준을 마련하는 근거가 오직 유용성과 실질성에서 비롯된 과학에 기반을 둔다면 그 한계가 뚜렷한 기준이라는 것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특히 이런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판단의 기준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느님에게 있는 사람입니다. 더 많은 질문을 해소하고 더 멀리 나아가는 현 인류인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은 여전히 힘있게 작용하고 있는지 늘 궁금합니다. 언젠가 모든 의문이 해결되면 마침내 우리는 선악을 온전히 알게 되고 하느님같이 되는 것일까요? 오늘 아침의 이 질문이 꽤 힘들게 다가올 저나 모든 이에게, 우리 삶이 힘겹고 헤쳐 나가야 할 눈앞의 어려움이 절대 적지 않은 모든 이에게, 그래도 우리는 언젠가는 이 질문에 도달해야 하고, 마치 정답이 없는 문제 앞에 선 난감함이 따르더라도 이러한 물음은 우리 안에 언제나 머물러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어려우셨죠? 질문은 늘 어렵고 정답은 따로따로인 듯 보입니다. 그래도 한 번쯤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너무 눈앞의 것만 쫓으면 자칫 좁은 세상에서만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아 한 번쯤은 이런 질문이 호사라 하더라도 던져보았으면 해서요. 적어도 나는 하느님의 길을 따르고 그분의 뜻을 묻는 살아 있는 신앙인이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정답을 못 찾더라도 질문하는 당신이 더욱 깊어지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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